면도기를 싸게 판다는 이야기의 절반 — 질레트 모델은 특허가 끝난 뒤에 성립했다
프린터를 싸게 팔고 잉크로 번다. 게임기를 원가에 가깝게 내놓고 게임으로 번다. 커피머신을 저렴하게 풀고 캡슐로 번다.
이 구조에는 이름이 붙어 있다. 면도기와 면도날 모델, 또는 질레트 모델이다. 본체를 미끼로 깔고 소모품에서 회수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이름의 출처를 따라가면 어긋나는 부분이 나온다. 질레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특허가 살아 있던 기간에는 비쌌다
킹 캠프 질레트가 안전면도기 특허를 받은 것은 1904년이다. 이후 약 17년 동안 특허가 유효했다.
통설대로라면 이 기간에 면도기를 싸게 뿌리고 면도날로 벌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기의 가격 자료를 검토한 연구들은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면도기 본체는 당시 기준으로 저렴한 물건이 아니었다. 상당한 값이 매겨져 있었고, 면도날도 함께 수익을 냈다.
싸게 팔아 기반을 깐 것이 아니라, 본체와 소모품 양쪽에서 모두 마진을 가져간 구조에 가깝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가격이 아니라 특허였다
여기가 핵심이다. 특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른 회사가 호환 면도날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면 사용자는 그 회사의 면도기를 산 순간, 면도날도 그 회사에서 살 수밖에 없다. 잠금 장치가 이미 걸려 있는 것이다.
잠금이 법으로 보장돼 있으면 본체를 싸게 팔 이유가 없다. 싸게 팔지 않아도 소모품 수요는 확보된다. 미끼 가격은 잠금을 만드는 수단인데, 잠금이 이미 있으면 미끼가 필요 없다.

싸게 팔기 시작한 것은 특허가 끝난 뒤다
1920년대에 특허가 만료되자 상황이 바뀐다. 다른 회사들이 호환 면도날을 만들 수 있게 됐고, 값싼 경쟁 제품이 들어왔다.
이때부터 저가 본체 전략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성격이 다르다. 시장을 만들기 위한 공격적 전략이 아니라, 잠금이 풀린 뒤 점유율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대응에 가까웠다.
즉 순서가 통설과 반대다. 싸게 팔아서 잠갔던 것이 아니라, 잠금이 풀리자 싸게 팔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모델의 진짜 조건은 무엇인가
이름과 실제가 어긋나 있어도, 모델 자체는 지금 여러 산업에서 작동한다. 다만 작동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 소모품 쪽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특허, 인증 규격, 전용 인터페이스, 계약 중 무엇이든 좋다. 통제가 없으면 본체만 싸게 팔고 소모품은 남이 판다.
- 재구매가 반복되어야 한다. 한 번 쓰고 마는 소모품이면 회수 기간이 안 나온다.
- 본체와 소모품의 사용 기간 차이가 커야 한다. 본체가 오래 쓰이고 소모품이 자주 갈리는 구조에서 회수가 성립한다.
- 회수 이전에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본체 손실을 아직 못 메운 상태에서 고객이 떠나면 그 고객은 순손실이다.
네 번째 조건이 실무에서 가장 자주 무너진다. 본체를 싸게 뿌리는 결정은 즉시 집행되고, 회수는 몇 년에 걸쳐 일어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가 이 전략의 실제 위험이다.
통제가 풀리면 구조 전체가 뒤집힌다
소모품 통제는 영원하지 않다. 특허는 만료되고, 규격은 복제되고, 호환품 제조사가 등장한다. 규제 당국이 호환품 배제를 문제 삼는 경우도 있다.
통제가 풀린 뒤에 남는 것은 싸게 판 본체가 잔뜩 깔린 시장이다. 소모품 마진은 경쟁으로 깎이는데 본체 손실은 이미 나간 뒤다.
그래서 이 모델을 쓰는 회사는 통제 수단을 계속 갱신한다. 인증 칩을 넣거나, 소프트웨어로 정품을 확인하거나, 구독 형태로 계약을 건다. 이 갱신 비용이 모델의 유지비이고, 그것까지 넣어야 실제 수익률이 나온다.
렌탈과 구독은 이 구조를 계약으로 바꾼 것이다
국내에서 이 모델이 가장 널리 쓰이는 형태는 렌탈이다. 정수기나 공기청정기를 사실상 무상에 가깝게 설치하고, 필터 교체와 관리 서비스로 회수한다.
여기서 통제 수단은 특허가 아니라 계약이다. 약정 기간을 걸고, 중도 해지에 위약금을 붙인다. 앞에서 본 네 번째 조건, 즉 회수 전에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법적 장치로 붙들어 놓은 것이다.
소프트웨어 구독도 형태만 다를 뿐 같은 구조다. 도입 비용을 낮추거나 없애고 사용 기간으로 회수한다. 이쪽의 통제 수단은 축적된 데이터와 익힌 조작 방식이다. 옮기려면 데이터를 이전해야 하고 사람을 다시 교육해야 한다.
세 형태를 나란히 놓으면 공통점이 보인다.
- 특허는 법이 잠근다.
- 렌탈 약정은 계약이 잠근다.
- 구독은 축적이 잠근다.
무엇으로 잠갔는지에 따라 풀리는 방식도 다르다. 특허는 날짜가 정해져 있고, 계약은 만기가 오면 재협상이 열리고, 축적은 경쟁사가 이전 도구를 제공하는 순간 약해진다. 잠금 수단을 알면 그것이 언제 풀릴지도 알 수 있다.
실무 적용, 그래서 뭘 하면 되나
- 본체를 싸게 내리기 전에 소모품 통제 수단부터 확인하라. 통제가 없으면 그냥 싸게 파는 것이다. 순서가 바뀌면 손실만 남는다.
- 회수 기간을 숫자로 적어라. 본체당 손실이 얼마이고 소모품 마진이 얼마이며 몇 개월이면 넘어서는지. 그 기간보다 고객 유지 기간이 짧으면 이 전략은 성립하지 않는다.
- 이탈률을 이 전략의 핵심 지표로 삼아라. 판매량이 아니라 유지율이 손익을 정한다. 본체가 많이 나갔다는 보고는 아직 손익이 아니다.
- 통제 수단의 남은 수명을 관리하라. 특허 만료일, 규격 공개 압력, 호환품 등장 시점. 만료일은 미리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래다.
- 유명한 사례일수록 원본을 확인하라. 이 모델은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은 회사의 이름을 달고 30년 넘게 인용됐다. 이름이 붙었다는 것과 그 이름이 정확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정리하면 이렇다. 미끼 가격은 잠금을 만드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일 뿐이고, 가장 비싼 수단이다. 더 싸게 잠글 방법이 있다면 본체를 깎을 이유가 없다. 질레트가 특허 기간에 한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본 콘텐츠는 공개된 문헌을 바탕으로 한 정보 해설이다. 초기 가격 정책에 대한 해석은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당시 화폐 가치를 현재와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작성: Inkmoat 편집팀 — 가격이 아니라 잠금 장치를 본다.
참고
- 안전면도기 특허(1904)와 존속 기간 중의 가격 정책에 관한 재검토
- 특허 만료 이후 저가 본체 전략의 등장과 그 방어적 성격
- 소모품 통제 수단이 없을 때 미끼 가격이 성립하지 않는 구조
- 본체 손실 회수 기간과 고객 유지 기간의 관계
- 렌탈 약정과 구독 계약이 잠금 수단을 대체하는 방식